박을복 자수박물관 홈페이지 방문을 환영합니다.
 
   
 
작성자 홍은주(문화방송 논설주간)
작성일 2005-12-26 (월) 11:30
ㆍ조회: 928  
미술, 그 황홀한 시간의 흔적(痕迹)
사막의 고즈녁한 침묵의 풍경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바람이 만든 물결모양의 사막 모래 위를 토끼와 코요테가 나란히 걸어간 발자국이 찍혀져 있는 사진이다. 이 사진에서는 오랜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우선 광활한 사막의 모래물결이 단시간에 이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영겁의 시간동안 바람이 이리저리 쓸고 지나간 자리에 미세한 조정을 거듭하면서 지금의 모래의 물결무늬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 위에 나란히 난 토끼와 코요테의 발자국역시 시간의 흔적을 웅변한다. 토끼와 코요테가 같은 시간대에 사이좋게 나란히 걸어갔을 리 만무하므로. 아마도 토끼가 먼저 걸어간 후 그 흔적을 쫓아 배고픈 코요테가 따라간 것이 아니었을까. 두 마리가 걸어간 발자국에는 분명한 시간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경기 중. 고등학교에서 9년을 재직하다가 서울여대 교수를 지내신 최 경한 선생님으로부터 ‘미술특강’을 듣기로 한 첫 날, 최 선생님이 준비한 슬라이드를 통해 마주친 한 장의 사막사진은 예술작품은 비록 평면위에 펼쳐져 있지만 그 안에는 오랜 시간과 역사가 녹아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 계기였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부터 미술을 통한 황홀한 7개월간의 시간여행이 시작됐다.
시간여행의 출발지는 우이동 산자락에 위치한 박 을복 자수 박물관, 오래전 최 경환 선생님으로부터 미술을 배우고 예술의 아름다움에 눈떴던 경기 중고등학교 후배 분들과, 우연히 오 영호 회장(경기 61회)으로부터 최 선생님의 미술강의 이야기를 듣게 된 우리 여성경제학회 회원들, 이밖에 몇몇 미술 동호인 등이 주축이 된 팀들이 함께한 여정이었다.
자연은 그 자체가 미술이며 인간이 그 아이디어를 자연으로부터 차용해 창조적으로 재연한 것이 미술의 본질적 요소라는 설명으로부터 시작된 미술사강의는 수많은 슬라이드를 통해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시간여행을 계속했다.  
크레타와 미로 등 그리스의 수많은 섬이 간직한 신화적 영역으로부터 중세를 관통하는 장엄한 종교화를 거쳐 르네상스의 자유로운 혼이 꽃피운 수많은 예술들이 슬라이드를 통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알타미라 동굴에 남아있는 사냥벽화와 영국 웨섹스 지방에 만들어진 거석문명의 흔적인 스톤헨지(stone henge), 인간의 원초적인 정신이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는 아프리카의 조형물 등 원시예술(primitive art)의 흔적이 쟈코메티등 현대 미술가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또 예술사에 어떤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도 동서고금의 예술 시간여행을 통해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또 이성과 과학이 종교의 절대적 신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인간의 자만심이 무너지고 불안과 좌절, 초조함이 인간의 정신을 일그러뜨리면서 생겨난 바로크 미술과(바로크란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이다) 사치와 허영이 만들어낸 정교한 곡선의 예술인 로코코 미술, 기꺼이 빛의 노예가 되었던 인상파에 이르기 까지 천 년이 넘는 세월을 넘나들었다.
이 여행 동안 수많은 예술가들도 많이 만났다. 이태리에서는 무뚝뚝하고 괴팍한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그의 라이벌이자 천지창조를 완성한 미켈란젤로(이 천재 화가가 왜 요즘 유행하는 악성 바이러스의 이름으로 둔갑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해결하지 못했지만) 등을 만났고, 네덜란드에서는 램브란트를 만나,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에 오히려 해학적으로 느껴지는 “톨프박사의 해부학 강의실”에 들어가기도 하고 “야경(夜警)”을 도는 사람들과 만나 네덜란드의 음울한 밤거리를 배회하기도 했다(모두 램드란트의 작품 제목임). 사진이 없던 시절 미술이 초상화를 겸한 사진대용으로 쓰였기 때문에 작가적인 재해석을 금지당한 채 돈을 낸 사람의 얼굴을 균등한 크기로 그려주어야 했던 램브란트의 고뇌의 일단을 접하기도 했다.
“뉴욕의 모든 베르메르”라는 영화가 만들어질 만큼 서양에서는 램브란트 보다 훨씬 더 인기가 있는 요하네스 얀 베르메르를 만나서는 “우유를 짜는 하녀”, “터번을 쓴 소녀”, “진주귀고리를 한 소녀” 등 정교한 묘사의 극치를 접하기도 했다.  
파리에서는 문명의 허무함과 지루함에 질려 증권업을 때려치우고 타히티의 원시문명으로 도피해야 했던 고갱과, 너무나도 강렬한 정신이 육체를 좀먹었던 고흐를 만났고 스페인에서는 천대받던 그리스 크레타섬 출신이면서도 에스파니아의 궁정화가로 초청될 만큼 솜씨가 좋았던 엘 그레코(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 엘 그레코는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이다)를 만났다. 또  나폴레온과의 전쟁중에 피난을 가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부역자로 몰려 결국 불란서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던 고야로부터 아픈 고뇌를 듣기도 했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해박한 미술과 역사, 인문지리 지식, 그리고 철자하나 틀리지 않고 영어와 불어는 물론, 스페인어, 그리스어, 심지어 라틴어까지 서판을 하시는 경이적인 기억력, 이런 최 경한 선생님으로부터 어린 시절 강의를 받고 일찌감치 미술과 예술, 미학에 눈 떴을 어린 경기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나는 미술사 강의 내내 부러워하고 질투(?)했다. 이런 강의를 좀 더 일찍 접할 수 있었더라면 내 정신이 훨씬 더 풍요로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과 함께.

7개월 동안 한 번 도 빠짐없이 매주 첫 째, 셋 째 토요일에 계속된 최 경한 선생님 미술여행의 마지막 강의는 단풍이 한창인 10월의 마지막 토요일 오후, 현대미술 강의로 끝났다. 사진의 등장과 함께 미술은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를 사진장르에 물려주고 자신은 비구상의 영역으로 진출한다. 요즘 경영학의 화두가 되어있는 이른바 ‘블루오션’을 만들어낸 셈이다. 사물에 대한 직접 묘사가 아니라 사물에 깃든 정신과 감각을 직관적으로 잡아내는 형태로 변모한 것이다. 도깨비를 묘사한 것 같은 피카소의 일그러진 여성상과 색채의 마술사라는 샤갈, 흘러내리는 시간을 미술적 표현으로 담아낸 달리 등을 거쳐 장르에 대한 파괴를 주목적으로하는 다다이즘이 등장하면서 현대미술은 그야말로 표현장르의 백화제방 시대를 맞는다. 변기가 출품되기도 하고 똥 모양이 쇼 케이스에 담겨져 전시되기도 하며 계곡에 천을 래핑(wrapping)하는 설치미술이 등장하기도 했다.
시종일관 자상하고 친절하게 미술여행을 안내해 주셨던 최 경한 선생님은 그러나 현대미술에 있어서는 더 이상의 부연설명을 해주지 않은 채 강의를 마감했다. 강의실 시간여행의 종점, 그러나 현대미술에 대해서는 각자 알아서들 새로운 출발을 하라는 뜻이었을까.
최 선생님의 뜻을 그렇게 받아들인 여성경제학회 멤버들은 미술을 좋아하는 몇몇 동호인들과 미술모임을 계속해 나가기로 의기투합했다. 미술모임의 이름은 ‘에피큐리언(Epicurean)’으로 명명했다. 쾌락주의자라는 일반적 해석을 내리지 말고 지성적 즐거움의 지속성이라는 뜻으로 이해주시길 바란다. 최선생님을 따라 이리저리 시공간을 흘러다녔던 황홀한 예술여행, 지적 즐거움을 지속할 수 있는 이름으로는 더할 나위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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