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을복 회고록
지난 삶을 돌아보며

 이신자 글
40년지기이며 선배이신 박을복 선생님

 김선숙 글
나의 은사 박을복 선생님

 오순희 글
우리 어머니

 박을복 회고록

이런 중에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생겼다 3공화국 출범직후 박정희 대통령이 기술입국으로의 독려를 위한 국제기능 올림픽을 개최하였는데, 이 대회에서 나는 자수 부문의 직종장 및 분과장으로 위촉을 받아 국제 무대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국제 미술가회의에 옵저버 자격으로 비엔날레에 참가하게 되어 구미 각국의 미술계를 시찰하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세계가 좁아져 외국에 나가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1961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책으로만 접하던 미술 작품들, 말로만 듣던 작업 환경들을 살펴보며 우리가 취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느끼게 되었고 그들과의 많은 차이가 경쟁력에서 온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 여행은 여러 의미에서 내게 많은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귀국 후에 나는 예지동집 주변이 동대문 시장과 가까워 주거기능이 변질되어 있고 병원도 확장 분리해야

할 것 같아 전원생활이 가능한 대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약 2,200평의 대지(우이동 86-4 번지)에 구미 여행에 동행했던 정인국씨의 설계로 약 100여평의 2층 양옥집을 짓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에게 맡겨 시작한 공사가 지지부진하여 2년여를 끌다 대강 마무리하고 정원과 그 외 부대공사를 진행하였다. 무엇을 만들어내는 즐거움과 가족들의 새 보금자리를 만든다는 즐거움으로 모든 정성과 시간을 기울였다. 그러나 가족들과 이 집에 살았던 기간은 불과 몇 년 되지 않는다. 진학, 유학, 그리고 결혼 등으로 식구가 줄고 나도 이사하고는 점점 주인 없는 집으로 변하였다. 지금은 나의 작품을 소장하여 두고 보는 장소로, 가끔 주말에 자식들과 들어 쉬어 가는 곳이 되었다.육 개월 간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작업에 몰두하였다. 개인적으로 삶의 안정뿐 아니라 외국 여행으로부터 창작의욕도 되살아났고 또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일년 남짓한 준비 끝에 「제1회 개인전」을 갖게 되었다. 대성황이었다. 각계의 인사들이 오셔서 관람을 했고 알지 못하는 분도 많이 와서 축하를 해주셨는데, 후일 방명록을 들춰보니 그 분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저명인사가 되어있었다. 이 전시회가 그처럼 화제가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후학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전시회가 우리나라 '섬유개인전' 제 일호였으며 자수계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당시 만해도 자수는 본을 얻어 색깔의 변화와 여러 가지 기법을 동원해 작품화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또 그것이 전통이었다. 자수작업은 지금도 그런 잔재가 남아있지만 실생활 품의 꾸밈 정도로 여겨져 좀처럼 전통기법을 탈피하기가 힘들고 새로운 시도는 더욱 힘들었다. 나름대로의 창작적 접근을 모색했던 것이 색다른 전시회의 냄새를 풍겼는지 모르겠다.
이로부터 약 십여년간이 내 삶에서 제2의 도약기였다고 생각된다. 3년 연이어 국전에 입선했고 전시회도 몇 차례 더 가졌으며 여러 인사들과의 교류도 많았다. 특히 목불 장운상선생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 데, 장 선생의 결혼 후에는 그의 처 이신자 선생과 작품에 관한 많은 의논을 하면서 친해져 지금까지 막역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또한 운보 김기창 화백과 그의 처 우향과도 매우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으며 특히 박래현 화백은 작품 제작에 직접적인 도움을 많이 주었다. 그밖에도 호수돈 여고에서 내가 가르쳤던 김영호를 비롯한 많은 졸업생들이 내가 작품전을 열 때면 만사 제치고 나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던 일은 어제까지나 가슴에 간직하고 감사하고 있다. 무슨 이해관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단지 스승과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이 참 아름다운 일이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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