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을복 회고록
지난 삶을 돌아보며

 이신자 글
40년지기이며 선배이신
박을복 선생님

 김선숙 글
나의 은사 박을복 선생님

 오순희 글
우리 어머니

 우리 어머니

     맏딸 오순희
     섬유미술가, 덕성여자대학교 교수

우리 어머니는 같은 시대의 다른 여성들과는 달리 동경 유학을 하신 분으로 당시의 용어로 말하자면 신여성이시다. 그러나 남들과 같이 결혼을 하여 가정을 가지고 자녀들을 키우면서 작품생활도 하시느라 남다른 생을 사신 분이다. 어머니는 내가 불란서 유학을 끝낼 무렵 파리에서 함께 전시회를 갖고자 오신 적이 있는데 그 당시 나는 Cit Universite라는 기숙사촌의 미국관 5층에 살고 있었다.

이곳은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항상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천장에 top light가 설치되어 있어 밝고 작업하기에 알맞은 aterlier였다. 이 작업실에서 어머니는 두 달 후로 예정되어 있던 미국 전시에 출품할 새 작품들을 제작하기 위해 칠월의 더위에도 아랑곳없이 밤낮으로 수를 놓으시며 나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셨던 기억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내가 다니던 Art Deco라는 미술 학교 강의에도 여러 날 참관하고 학기말 과제전도 둘러보시면서 그곳의 분위기를 무척 부러워하셨다. 아마도 어머니께서 좀 더 젊었더라면 파리에 남아서 계속 작품 생활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특히 천연 염료 실습시간에는 직접 참여하여 실염색도 해보고 본인이 필요한 염료의 씨도 얻으셨다. 고국에 돌아가서 우이동 집 뜰에 그것들을 심어 소출해가지고 계속 연구해보려는 열정에서였다. 애써 완성한 수 작품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빛이 바래가는 것을 보는 것이 안타까워 그런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학기가 끝나고 Art Deco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Mulhouse의 textile 공장견학을 간 적이 있었는 데 어머니도 함께 동행하면서 예술의 본 고장인 불란서의 감각과 섬유의 표현기법 및 세련된 색감의 조화 등을 보고 감탄하시며 여행을 즐기셨다.
올 여름에 나는 한국 섬유미술가회에서 주관한 베니스 비엔날레 및 로잔느 비엔날레의 참관단 일행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2주 동안 뜻깊은 여행을 하였다. 우연하게도 아침 새벽에 눈을 떠보니 어머니는 벌써 가방준비를 끝내신 것은 물론 운동화까지 신으신 채로 반듯이 주무시는 것이었다. 잠깐 지켜보고 있으려니까 신발이 불편하셨던지 운동화를 살짝 벗어버리고 다시 주무시는 것이었다. 혹시나 아침에 늦어 젊은 일행들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였나 보다. 여행 중에도 안내인 옆에 붙으셔서 설명도 빠지지 않고 들으시며 피곤한 기색도 없이 즐겁게 여행하시는 것을 보고 우리 일행들은 모두 놀랐다. 가장 고령자이시지만 처지지 않고 끝까지 즐거운 여정을 마치시는 모습에서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셨다.
항상 나들이를 좋아하시는 우리 어머니는 친구들과 어울려 골프도 치시고 때로는 화투놀이도 즐겨하시고 요즈음에는 주말등산이 일과처럼 되다보니 스치는 등산객들이 고령이신 데에 감복하여 나이를 물어보면 "많은 것이 내 나이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대단히 용하십니다."라고 하면서 의아한 눈초리들이다. 그래도 최근까지 디자인이 떠오르면 곧 잘 돋보기를 겹쳐 끼어가면서 수틀을 가까이 하신 결과 여러 점의 소품을 남기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니까 이것을 놓지 내 나이면 바늘귀가 서넛으로 보인다."하며 보고 있는 우리를 힐끗 올려다보면서 쓴웃음을 지신다.
내가 섬유예술을 하게 된 것도 자수를 하시는 어머니 영향이 컸으며 해외유학시절에 남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섬유예술을 이해하고 헌신적인 후원을아끼지 않으신 어머니 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