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을복 회고록
지난 삶을 돌아보며

 이신자 글
40년지기이며 선배이신 박을복 선생님

 김선숙 글
나의 은사 박을복 선생님

 오순희 글
우리 어머니

 박을복 회고록


그러나 주위의 환경은 나를 선생으로 예술가로 내 일에만 몰두하게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요새라면 몰라도 당시 여성이 나이가 차도록 혼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로는 매우 늦은 27세라는 나이에 나는 결혼을 했다. 신랑은 당시 경성제대 의학부를 나온 의사로 수재(手才)소리를 듣던 평안도 남자였다. 결혼을 하면서 나는 이 분과 가정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소위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관습에 맞추어 교직도 그만두고 나의 작업도 일단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결혼하여 나는 두 아들과 두 딸의 어머니가 되었다. 이 사이에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었고 많은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다. 내게는 이 아이들을 훌륭히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욕심도 생겨났다. 당시 우리 사회는 가난과 빈곤에 찌들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만이라도 돈 때문에 고생시켜서는 안된다는 이기적 모성애도 고개를 쳐들었다. 남편은 개성형무소 의무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봉급만으로 가계를 꾸려나가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살림을 하며 한편으로 밖으로 나다니며 돈벌이를 하는 사이에 자수에 대한 나의 꿈이 자꾸 식어 가는 것만 같아 불안하면서도 닥친 현실을 피할 길은 없었다. 49년 막내를 낳았는데 그 해에 개성 「송학산 사건」이 있었다. 너무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이곳에서는 안되겠다 싶어 남편이 마포형무소 의무과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데리고 고행을 떠나 서울 마포에 있는 관사로 살림을 옮겼다. 넉넉하지 못한 서울살이가 채 몸에 익기도 전에 전쟁이 터졌다. 남편은 고지식한 분이라 한 부서의 책임자로서 피난길에 나서는 것을 꺼려하셨고, 또 이 전쟁이 얼마나 갈까하는 막연한 낙관으로 온 식구가 서울에 남게 되었다. 6.25때 고생 안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이때 겪은 온갖 고초와 생명의 위협은 말로 형언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그 후 중공군이 다시 쳐내려와 이번에는 바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부산 피난 생활은 오히려 서울에 남아있던 때보다 나았다. 우연히 형편이 좋은 친척과 친지를 만나 여러 가지 도움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자수에 다시 손댈 수 있었고 이화여전 가정과에 강의도 나가게 되었다. 수복 후 한참을 부산에 남아 있다가 다시 서울로 옮겼다. 친지의 도움으로 을지로 4가에 내 집도 한 칸 마련하였고 남편은 이 집 일층에 오소아과 의원을 개업하였다. 이렇게 몇 년이 흘러가는 사이에 아이들도 자라나 중·고등학교 학생이 되었다.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명문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뿌듯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했다. 한편으로 나 자신까지도 생활의 안정을 찾아 작업에 대한 열망이 다시 솟구치기 시작했다.


1 2 3 4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