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을복의 자수예술
     이경성, 미술평론가
     前 국립현대미술관장

 박을복여사의 작품집 간행을 축하하며
     운보 김기창, 동양화가

 작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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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을복의 자수예술
   이경성, 미술평론가

1. 한국의 자수예술
  
실을 바늘에 꿰어 천에 수를 놓는 것으로 조형을 이룩하는 자수 예술은 그에 필요한 찬찬한 솜씨라든가 인내심으로 볼 때, 규방예술의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수예술은 여인들의 희로애락과 생활감정이 담긴 특수한 예술이다. 이 자수 예술은 주로 의복이나 장식, 공예품 등에 걸쳐 다양하게 이루어져왔고 우리 공예미술의 대표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각 시기마다 나름대로 행해졌던 자수의 흔적이 남아있긴 하나, 조선 시대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매우 희귀하다. 이것은 재료라든가 보존의 문제와 더불어 자수의 결과물들이 매번 일종의 소모품처럼 쓰여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남아있는 대부분의 한국자수는 조선시대의 것인데, 그것은 궁중용이었던 궁수(宮繡)와 민간이 수용했던 민수(民繡)다.
궁수는 주로 궁중에서 수방상궁(繡房尙宮)에 의해 놓여진 수를 말하는 데, 그들은 상당히 숙련공이어서 세련되고 격조 높은 작품들이 많다. 그러나 궁수는 대체로 어느 한 사람의 독특한 개성에 의해 놓여진 수가 아니라 궁중에서 정해놓은 규범과 공식에 의해서 놓여진 전통자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민수는 일반가정에서 부녀자들이 생활상의 필요에 의거하거나 또는 창작적 충동에 의해서 놓여진 수로 보고 느낀 그대로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데서 나타나는 천진성을 갖고 있다.
한국 전통자수의 형식은 다음과 같이 재료, 기법, 문양, 염색, 구도 등의 여러 측면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는 것이 편리하다. 재료기법의 측면에서 보면 무엇보다 우리 '꼰실'이라는 것이 한국 전통자수의 대표적인 특색의 하나인데. 시대에 따라서 그 꼬임수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수사(繡絲) 자체가 체적(體積)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주목되는 기법을 구사하여 수 작품에 양감과 촉감을 드러내고 있다. 기법은 주로 넓은 면을 메꾸는 평수(平繡), 자릿수 등 가장 많이 쓰이는 기법을 비롯하여 이음수, 징검수 등 50여 종의 기법이 있지만 비교적 많이 쓰이는 기법은 10종 안팎이었다. 문양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인 부귀장수(富貴長壽)를 배경으로 장생문양(長生紋樣)과 길상문양(吉祥紋樣)이 대종을 이루고 있고, 이에 곁들어 식물형태, 상상적인 것, 신앙적인 요소 등이 도안화된 독특한 문양이 널리 복합시문(複合施紋) 되어 있다. 염색은 주로 주사(朱砂), 녹청(綠靑), 감청(紺靑)등의 광물성 염료와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즙 등이 주염료로서 사용되었다. 이들 양질의 천연염료로 염색된 수사와 수지로 이루어진 수작품의 색감은 자연히 은근한 친근미를 나타낼 뿐 아니라 깊이 가라앉아 배어 나오는 듯한 한국 전통색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2. 박을복의 작품 세계
자수가 박을복은 1915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3년 호수돈 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예과를 거쳐 1937년 일본 동경여자미술대학을 졸업하여 이후 여러 방면에서 후진양성과 작품활동에 전념해 온 자수예술가이다. 당시 동경여자미술대학에는 여러 한국학생들이 유학 중이었지만 박을복은 자수를 전공한 사람으로 오늘날까지 활동하고 있는 보기 드문 생존자이다.
1938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고향인 개성으로 돌아와 그는 모교인 호수돈여고에서 교편을 잡아 후진양성을 하는 동시에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에 활약할 수 있는 무대는 「조선미술전람회」였기에 그는 1938년에 개최된 동 전람회에 출품, 입선하여 작가로서 본격적인 출발을 하였다. 당시 입선된 작품 '桃花와 鴛鴦'은 대각선 구도로 위에 꽃을 곁들이고 한 쌍의 원앙이 배치되어 있는 작품이다. 왼쪽 공간은 시원하게 트이게 하고 오른쪽 공간에는 대상물을 가득 채운 구성으로 되어있다. 기법은 두꺼운 릴리프 감각이 느껴지게 실을 겹쳐 수를 놓은 작품으로 탄탄한 기초를 보여준다.
1951년 이후 부산 피난 생활 중에는 이화여대, 그 이후에는 수도여자 사범대학에 출강했으며, 1961년에는 구미 각국의 미술계를 둘러보고 자수의 현대적인 방향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62년에는 국전에 출품하는 동시에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하였는 데,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린 바 있어 소개한다.

(동아일보 기사-제목:調和된 色彩와 構成-朴乙福 刺繡 個人展을 보고)
" 朴乙福 女史의 第1回 刺繡展을 보고 적이 놀란 것은 女史가 十余年間의 沈默을 깨뜨리고 刺繡界에 새로운 理念의 世界를 마련했다는 일이다. 作品에 接한다면 가장 手苦가 많은 것은 屛風이다. 자칫하면 單調롭게 整理되어 버릴 多幅의 處理가 纖細하고 綎密한 構圖와 色의 調和로 雅淡하게 이끌어졌으며 동시에 輕快한 時代感을 엿보이게 하고 異彩로운 取題로 변화를 보여주었고 흔히 刺繡屛에서 느끼는 지루한 感을 免하게 한 것은 여사의 銳利한 感覺과 꾸준한 努力에서 오는 所産이라고 본다. 몇몇의 洋式芳席으로 우리 傳來의 묵직한 그것에 하나의 輕快한 조화로 色彩를 구성했으며 毛絲로 간결하게 처리한 아름다운 線의 움직임은 동양적인 표현의 極致라고 보는 바이다. 약간의 욕심을 말한다면 陣列作속에 한 '세트'라는 同系統의 육중한 빛이 重複되어 어딘지 무거운 感을 자아내고 있으나 이것은 '繡'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韓式 室內裝置레서 항상 問題되는 하나의 課題가 아닌 가 하는 느낌이다. 二幅의 作品 '落葉'등의 在來式 表現이 눈에 뜨인다. 全體的으로 보아 着實하고도 硏究性을 보여준 좋은 展示會라고 본다.(朴崍賢, 東洋畵家)

1962년에는 개인전을 가졌을 뿐 아니라 왕성한 창작욕을 보인 해로서 비교적 많은 작품들이 남아 있다. '塔婆' 6곡 병풍, '長生圖Ⅰ' 8곡 병풍, '古腕' 4곡 병풍, '落葉' 가리개, '一數百獲', '作品A', '作品B' 등 이때의 작품 세계를 보면 그가 고이 간직하고 있는, 1936년 동경여자 미술대학 재학 시절의 학습교본인 '種類繡 124종'의 영향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다분히 한국적인 주제와 기법으로 전환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1934년 한국인으로 일본에 건너가 거의 일본적인 분위기와 기법에 의해서 자수가로 출발하였다. 그러기에 이때 수련기의 작품들은 비교적 무비판적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기본을 그대로 답습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작품이 바로 1937년 '御駕'란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일본의 전통 자수의 분위기와 기법을 송두리째 갖고 있는 것으로 그의 성장과정으로 보아 하나의 학습기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1962년 개인전에 와서는 한국적인 주제와 감각으로 전환되었으니 그간 작가로서 고민과 연마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그가 몸에 지니고 있는 일본자수에 비해 새로 탈피한 한국적인 자수의 세계는 덤덤하고 공간의 여백을 적절히 활용하는 전혀 새로운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한국의 사군자(四君子)가 갖고 있는 격조 높은 미의 세계가 자수예술로서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63년에는 국전에 연달아 출품하였는데 가령 63년도 출품작 '天下大將軍'은 화면 재구성이라든가 표현의 추상화 등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당시 회화분야에서 일어난 작업의 새로운 흐름과도 상당한 공통점을 지닌 회화적 효과에 도달하고 있다. 예를 들면 김기창, 박래현등의 회화작품에서 볼 수 있는 내적인 효과가 자수가 박을복의 작품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데, 여기서 회화가 먼저냐 자수가 먼저냐를 따지기보다는 당시 미술계의 공통된 미적 표정이라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더구나 1964년 12회 국전 입선작 '表情'은 화면 가득히 인물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키고 입체적인 표현기법에 의해서 실현되고 있다. 그 작품에서는 특히 대상을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놀라운 기법이 나타나고 있다.한편 그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現 세종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1967년에는 제2회 개인전을 공보관에서 가졌는 데 본인이 자수가 박을복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이때였다. 그때 작품 '고구려 벽화에서', '새', '사슴', '石榴', '作品 A', '꿈', ' 長生圖Ⅱ', '詩像에서', '國花', '琵琶'등이 남아 있는데, 거의 원숙한 경지에 도달한 그의 기법은 특히 '石榴'와 같은 작품에서 그 무게를 더해가고 있다. 아울러 '長生圖Ⅱ', '詩像에서'와같은 작품에서는 고도로 조형화된 형식을 지닌 환상적인 미에 도전했다.1975년 신세계 미술관에서 가진 회고전에서 더해지는 것이 '나드리', '병아리', '群像', '토끼' 등의 작품이다. 이때 작품들은 재래적인 기법에서 벗어나 보다 단순화된 구도와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1979년 구미여행을 거치면서 작품화된 '에펠탑'과 '復活'과 같은 작품은 프랑스적인 감성과 형식을 받아들여 이를 자수적으로 표현하고자했던 작품이다. 이미 6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자수에서 벗어나 새로운 외국의 기법을 연구하려는 일면을 엿보이기도 했다. 그러한 노력의 성과가 1980년에 제작한 '繡의 根源'이라는 작품에서 보듯이 염색에 의해서 화면을 사등분한 색상 위에 실로 일정한 흐름을 느끼게 하는 거의 추상화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 오랫동안 일본자수, 한국 자수 등 전통적인 자수에서 맴돌던 그가 구라파 여행에서 얻은 참신한 감각으로 이룩한 기념할만한 작품이다.

3. 맺음말
일제에 의해서 자발적인 근대화의 기회를 빼앗긴 한국의 예술가들은 전통과 새로 밀려들어오는 외래사상에 끼여서 스스로 변신해야만했다. 크게는 국가의 멸망에서 오는 민족적인 허탈감, 그리고 살아 남기 위한 치루어 할 생의 부담을 무거울 뿐이었다.한국 자수의 선각자 박을복이 1930년대 중반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을 통해서 자수를 배우고 돌아와 자기가 배운 일본 자수와 우리나라에 존재하고 있던 한국의 전통자수 사이서 왜색을 불식하고 한국미로 변신한 과정은 남모르는 고뇌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모든 선각자가 그랬듯이 이러한 고뇌는 그가 역사적으로 치루어야 했던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 가혹한 운명을 여인다운 부드러운 솜씨와 감각, 지성으로 처리해간 것이 곧 그의 자수 세계이다. 초기의 치밀한 완벽성을 추구한 작품에서 시작하여 점점 덤덤하고 조야하고 단순화시키는 한국적인 미의 구현에까지 도달해 간 그의 작품세계의 긴 여정은 곧, 한 자수가의 생이라기보다는 비극적인 양상을 지닌 시대의 상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