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들어서는 살아가는 데 새로운 기운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자수이외의 활동을 많이 했다. 골프도 치고 등산도 자주 다녔다. 특히 평창동에 사는 큰딸 내외, 그들의 친구(박용문 교수·연대 수학과, 김승희 교수·국민대 금속공학과)부부와 함께 하는 주말 삼각산 여행은 지금까지도 나에겐 커다란 낙이며 큰 힘이 된다.
기회가 닿는 대로 친구들과 외국 여행도 많이 다녔다. 미국이나 유럽뿐만 아니라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싶었다. 동남아, 대만, 중국, 호주, 동구라파, 러시아 등을 두루 구경하고 그들의 문화·예술 세계를 보았다. 올 7월초에는 한국 섬유미술가회에서 주관한 스위스 로잔느 비엔날레와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관하였는데 열심히 둘러보는 젊은 섬유미술가들을 보면서 이들이 바로 내가 이루지 못한 섬유예술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 든든함을 느꼈다. 어디든 그들 나름대로의 역사를 가지고 자기 식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여행과 취미생활 가운데 나는 늘 작품 생각을 마음에 담고 있다. 요즘도 자수에서 마음을 놓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해본다. 머리카락을 재료로 써보면 어떨까 해서 긴 머리카락을 모으고 있다. 내가 자수의 독자적인 세계를 표현하려고 애를 써왔지만 전통적인 인습과 기법을 뛰어 넘기에는 이제 나이를 너무 먹었다는 생각이 든다. 조상들의 공예중 이 자수가 거의 아낙네들의 몫이고 생활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부문의 공예에 비해 획기적인 변혁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옛 전통을 고수하면서 아울러 미세하고 정교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자수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평생을 자수 하나에 바치려고 긴 여정을 걸어 온 것은 아니다. 겉보기에는 나름대로 생활에 충실했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실은 자수 하나에 집념하기에는 쉽지 않은 삶이었다. 여자로서 한계라 할까 자평해 본다. 새벽이슬에 젖은 버선발의 짧은 행보(行步)가 있었다고 어여삐 여겨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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