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Navi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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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위의 환경은 나를 선생으로 예술가로 내 일에만 몰두하게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요새라면 몰라도 당시 여성이 나이가 차도록 혼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로는 매우 늦은 27세라는 나이에 나는 결혼을 했다. 신랑은 당시 경성제대 의학부를 나온 의사로 수재(手才)소리를 듣던 평안도 남자였다. 결혼을 하면서 나는 이 분과 가정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소위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관습에 맞추어 교직도 그만두고 나의 작업도 일단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결혼하여 나는 두 아들과 두 딸의 어머니가 되었다. 이 사이에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었고 많은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다. 내게는 이 아이들을 훌륭히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욕심도 생겨났다. 당시 우리 사회는 가난과 빈곤에 찌들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만이라도 돈 때문에 고생시켜서는 안된다는 이기적 모성애도 고개를 쳐들었다. 남편은 개성형무소 의무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봉급만으로 가계를 꾸려나가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살림을 하며 한편으로 밖으로 나다니며 돈벌이를 하는 사이에 자수에 대한 나의 꿈이 자꾸 식어 가는 것만 같아 불안하면서도 닥친 현실을 피할 길은 없었다. 49년 막내를 낳았는데 그 해에 개성 「송학산 사건」이 있었다. 너무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이곳에서는 안되겠다 싶어 남편이 마포형무소 의무과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서울 마포에 있는 관사로 살림을 옮겼다. 넉넉하지 못한 서울살이가 채 몸에 익기도 전에 전쟁이 터졌다. 남편은 고지식한 분이라 한 부서의 책임자로서 피난길에 나서는 것을 꺼려하셨고, 또 이 전쟁이 얼마나 갈까하는 막연한 낙관으로 온 식구가 서울에 남게 되었다. 6.25때 고생 안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이때 겪은 온갖 고초와 생명의 위협은 말로 형언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그 후 중공군이 다시 쳐내려와 이번에는 바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부산 피난 생활은 오히려 서울에 남아있던 때보다 나았다. 우연히 형편이 좋은 친척과 친지를 만나 여러 가지 도움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자수에 다시 손댈 수 있었고 이화여전 가정과에 강의도 나가게 되었다. 수복 후 한참을 부산에 남아 있다가 다시 서울로 옮겼다. 친지의 도움으로 을지로 4가에 내 집도 한 칸 마련하였고 남편은 이 집 일층에 오소아과 의원을 개업하였다. 이렇게 몇 년이 흘러가는 사이에 아이들도 자라나 중·고등학교 학생이 되었다.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명문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뿌듯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했다. 한편으로 나 자신까지도 생활의 안정을 찾아 작업에 대한 열망이 다시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런 중에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생겼다. 3공화국 출범직후 박정희 대통령이 기술입국으로의 독려를 위한 전국기능경기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대회에서 나는 자수 부문의 직종장 및 분과장으로 위촉을 받아 국제 무대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유네스코( Unesco) 국제조형미술가협회 총회에 옵저버 자격으로 비엔날레에 참가하게 되어 구미 각국의 미술계를 시찰하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세계가 좁아져 외국에 나가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1961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책으로만 접하던 미술 작품들, 말로만 듣던 작업 환경들을 살펴보며 우리가 취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느끼게 되었고 그들과의 많은 차이가 경쟁력에서 온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 여행은 여러 의미에서 내게 많은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귀국 후에 나는 예지동집 주변이 동대문 시장과 가까워 주거기능이 변질되어 있고 병원도 확장 분리해야 할 것 같아 전원생활이 가능한 대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약 2,200평의 대지(우이동 86-4 번지)에 구미 여행에 동행했던 정인국씨의 설계로 약 100여평의 2층 양옥집을 짓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에게 맡겨 시작한 공사가 지지부진하여 2년여를 끌다 대강 마무리하고 정원과 그 외 부대공사를 진행하였다. 무엇을 만들어내는 즐거움과 가족들의 새 보금자리를 만든다는 즐거움으로 모든 정성과 시간을 기울였다.
그러나 가족들과 이 집에 살았던 기간은 불과 몇 년 되지 않는다. 진학, 유학, 그리고 결혼 등으로 식구가 줄고 나도 이사하고는 점점 주인 없는 집으로 변하였다. 지금은 나의 작품을 소장하여 두고 보는 장소로, 가끔 주말에 자식들과 들어 쉬어 가는 곳이 되었다.육 개월 간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작업에 몰두하였다. 개인적으로 삶의 안정뿐 아니라 외국 여행으로부터 창작의욕도 되살아났고 또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일년 남짓한 준비 끝에 「제1회 개인전」을 갖게 되었다. 대성황이었다. 각계의 인사들이 오셔서 관람을 했고 알지 못하는 분도 많이 와서 축하를 해주셨는데, 후일 방명록을 들춰보니 그 분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저명인사가 되어있었다. 이 전시회가 그처럼 화제가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후학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전시회가 우리나라 '섬유개인전' 제 일호였으며 자수계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당시 만해도 자수는 본을 얻어 색깔의 변화와 여러 가지 기법을 동원해 작품화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또 그것이 전통이었다. 자수작업은 지금도 그런 잔재가 남아있지만 실생활 품의 꾸밈 정도로 여겨져 좀처럼 전통기법을 탈피하기가 힘들고 새로운 시도는 더욱 힘들었다.